부족한 그대로 동지가 됩시다. 

 사회가 달라졌다. 아니, ‘틀려졌다‘라 하는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배타적이다. 각박하다. 어떻게든 단점을 찾으려 한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대부분 사람들은 무엇이 원인인지 잘 알고 있다.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경제와 의식이다. 경제적 양극화는 박탈감을 낳았고 이를 부추기는 것들이 많다. 언론과 방송, 기타 매체들. 게다가 SNS 속 타인의 삶의 정점들까지. 많은 이들이 이에 너무 쉽게 휩쓸려버렸다. 특별한 것들을 평균치 또는 최저 기준으로 설정한다. 그러니 많은 순간들이 불안하고 불행해지는 건 너무 당연하다. 스스로에게만 적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변인들과 사회에 전염시킨다. 판단 오류와 사고 오류, 그것이 행동 오류로 번지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손절‘이라는 어휘가 확산됐다. 손해보고 자른다는 의미. 몇 년간 코로나19를 겪으며 주식 투자가 더 대중화된 그 어느 때부터 급격히 사용이 많아졌다. ‘손절‘은 의미가 확장되어 누군가와 연을 끊는다는 의미로도 쓰이게 됐다. ‘손절했다.’ 이상하다. 지금 그와 사이가 나빠졌거나 그에 대한 불만이 있는 것일 뿐인데, 그와 알고 지낸 모든 시간들의 일을 손익 계산을 하면 손해라는 것이다. ’손절‘을 결정한 자들의 손절이 손해본 것은 아닐텐데 그렇게들 손절 손절 해댄다. 한 술 더떠 인생을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은 자신을 힘들게 하는 관계를 손절하라 부추긴다. 그게 현명한 것인 양,그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신이 이 결정을 내린 우월한 존재인 양,자신은 아무런 흠결 없는 완벽한 성격과 행동만을 하는 존재인 양 말이다. 그러한 관계도 당연히 있겠지만, 이런 시류는 사람들간의 관계를 흔들고 가볍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사회 구성원들의 외로움 평균치를 높히는데 한 몫 했다. 그야말로 ’연애를 글로 배웠어요‘처럼 ’인생을 유튜브로 배운다‘는 것 같다. 그럴싸해보이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게 현명한 것처럼 말하지만 그게 정말 그런가.
 자신에게 너그러운만큼 주변인들에게도 너그러워지자. 문제가 있다면 자르기 전에 개선 시도부터 해보자. 서로 생각을 말해보고 들어주자. 그걸 지속해보자. 그렇게 ‘손절’을 손절하자. 앞으로 이런 생각들을 남겨보겠다. 거점 내 감상과 사유에서. 저를 이해해주세요. 당신을 이해해보려 노력하겠습니다. 

 이제, 우리, 부족한 그대로 동지가 됩시다.